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흐메드 알리 (문단 편집) === 실력 행사 === [[파일:이집트터키.png]] 메흐메트 알리 지배기의 --크고 아름다운-- 이집트 영토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7/Ottoman_Egypt.png|원본]] 1830년대에 그치긴 했지만 3개 대륙에 걸친 대국이었다. 메흐메트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통해 재조직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실력 행사에 나섰다. 1805년 [[와하브파]]를 신봉하며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는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를 점거하자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4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집으려는 [[근본주의]] 종파인 와하브파의 등장은 칼리프 칭호를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지척인 이집트에서 한창 기반을 다지고 있는 메흐메트 알리 자신에게도 충분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또한 중앙정부를 대신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중앙정부의 호의를 얻어 정치적 입지를 쌓을 수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미 쇠퇴를 시작해 일개 오지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자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 중앙정부가 손을 뻫지 못하는 공백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야금야금 불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메흐메트 알리는 술탄의 명을 받들어 와하브 반란 진압에 나선다. 그 와중에 1807년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보내 공격하자 격렬하게 저항하여 물리치기도 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헤자즈]]에 파견하였고 1년여 만에 헤자즈를 수복하였다.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곧바로 이집트 진압군은 사우드 가문의 근거지인 네지드를 휩쓸었다. 메흐메트는 훗날 반란의 씨를 남기지 않도록 사우드 가문을 추격하여 말살할 것을 명령해 2년여에 걸친 아라비아 전체를 헤집는 추격전 끝에 사우다 가문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한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저항 역량은 이 때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뿌리채 뽑히는 바람에 이후 19세기 말까지 사우드 가문은 숨죽여 지내며 세력을 다시 키우게 된다.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알리는 점차 자신의 군주인 술탄의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대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다음 먹잇감을 노리던 메흐메트의 눈에 띈 다음 목표는 [[수단 공화국|수단]]이었다. 수단은 각종 자원과 금, 노예가 풍부하지만 이집트에게 저항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공 목표로 아주 적당한 땅이었다. 1820년 메흐메트는 5천여 명의 군대를 수단에 파견하여 수단 정복을 명령했다. 수단을 침공한 이집트군은 센나르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수단은 1956년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의 보호 하에 들게 된다. 한편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한 반란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은 예전에도 그리스에서 반란이 여러번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에 성공한 만큼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그리스 독립군의 격렬한 저항에 쉽게 진압이 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술탄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메흐메트는 본국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크레타]]와 [[모레아]]를 얻으며 자신의 이집트 총독 자리를 [[이 차는 이제 제 겁니다|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한시가 급했던 술탄은 메흐메트의 요구를 수용했다. 곧바로 메흐메트는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지원군을 그리스로 파견한다. 하필이면 이 때 그리스는 지휘권을 두고 독립군끼리의 내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내전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과 맞서 싸워야했고 결국 대부분의 장악지역을 빼앗기고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그리스에서 이집트군은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 파괴를 일삼았으며 사로잡힌 그리스인들은 모두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아치웠다. 메흐메트 알리는 아예 자신의 그리스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이집트인들을 차출해 그리스에 정착시키려 기도하기도 했다. 이 순간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의 잔혹행위에 국내 여론이 시끌벅적해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대 열강이 그리스 독립군의 편을 들어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하였다. 3대 열강은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반란 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를 오스만 산하의 자치국으로 남기는 내용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기껏 반란 진압 직전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도루묵 상태로 돌아가기 싫었던 오스만과 이집트는 열강의 제안을 당연히 거부했다. 이에 열강은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한 댓가를 [[나바리노 해전]]으로 치르게 해주었으며 이후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그리스 일대의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을 차례차례 무장해제시켰다. 열강은 그리스 민족에게 자결권이 있음을 선포하였으며 이후 직접 나선 러시아는 오스만에 전쟁을 선포하여 오스만을 박살내버리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오스만은 마지못해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